구글 서치어드바이저 구글 서치어드바이저 끝 (술) 소주에 대해서 말해보자
본문 바로가기
술and음식

(술) 소주에 대해서 말해보자

by 리턴제로 2021. 7. 23.
728x90
반응형
SMALL
SMALL
반응형

한국인 하면 빼놓을 수 없는것중 하나가

 

바로 '술'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많은 애호가를 가지고 있는 소주에 대해서 말해보자.

 

다양한 소주들

먼저 소주는 곡류를 발효시켜 증류하거나, 알코올을 물로 희석하여 만든 술로 

 

무색투명하고 알코올 성분이 많다. 

 

술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소주

 

2009년 기준 국내에서 소비된 소주는 32억 병을 넘어섰다. 시장 규모는 제조사별 출고 금액을 기준으로 2조 8,500억 원

 

에 이른다. 2010년, 한국주류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성인 한 명이 한 달 평균 5.8병의 소주를 마셨다고 한다(맥

 

주는 7.2병)(1인당 맥주는 약 150병 소주는 80병을 먹는다). 한때 젊은 층들이 소주 대신 맥주를 선호했지만 주류회사의

 

의욕적인 마케팅(소주의 도수가 젊은층, 특히 여성을 타깃으로 계속 내려가는 것)으로 소주가 대한민국 ‘대표 술’의 타이

 

틀을 유지하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술 하면 소주를 제일 먼저 떠올린다(국민의 65%가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술이 소주라고 응답했

 

다. 재미있는 것은 마시는 경우가 ‘고민 상담을 할 때’라는 대답이 전체의 47.2%라고한다. 맥주는 피로와 스트레스 해소

 

를 위해 마시지만 소주는 고민상담이나 의논같은 무거운 주제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마신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주는 아

 

주 기쁠때나 슬플때도 마실 수 있는 술이기도 하다.)

 

국민술 소주, ‘전시 임무고지 생산품목’으로 지정되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소주는 전시 동원 품목으로도 지정이 됐다. 남북 분단 상황에서 비상사태를 대비하는 것은 당연한일

 

이므로 정부는 급변사태를 대비해 평상시에 유사시 물적 동원에 쓰이는 전략 품목에 대비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식품을 비롯해 유사시 방위산업으로 전환되는 산업의 경우에 ‘전시 임무고지 생산품목’으로 정해 생산하도록

 

돼 있다.

 

소주도 이런 전시 임무고지 생산품목에 선정돼 있다. 이에 따라서 소주 제조업체의 경우 비상시 임무고지 생산품목으로

 

지정된 소주 생산량 가운데 일정량을 공급하도록 의무화돼 있다. 이 정도면 소주를 국민술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소주()는 일본식 조어

 

여기서 소주의 정확한 명칭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보통 소주라고 하면 한문으로 소주(燒酒)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 많은데 소주의 상표를 잘 살펴보면 희석식 소주(稀釋式 燒酎)라고 적혀 있다. 왜 소주(燒酒)가 아니고 소주(燒酎)일까?

 

소주를 내리는 데 쓰는 재래식 증류기, 소줏고리

 

 

원래 조선시대 후기까지 소주는 소주(燒酒)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소주(燒酎)가 됐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주(酎) 자

 

의 뜻을 확인해 보면 ‘세 번 빚은 술’이란 뜻이다. 문제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은 소주를 세 번 빚은 술이니 알코올

 

농도가 높다는 뜻에서 주(酒) 대신 주(酎)를 썼던 것이다. 일본인들이 보기에 조선인들이 소주를 만들 때 한 번만 증류하

 

는 것이 아니라 두세 번씩 증류한다고 해서 세 번 빚었다는 표현을 넣었지만, 증류를 두세 번 한 것은 술을 세 번 빚는 것

 

과는 다르다. 한마디로 소주(燒酎)는 일본식 조어다.

 

주정에 물과 감미료를 넣어 만들어 희석식 소주라 하다

 

그렇다면 희석식 소주란 대체 무슨 뜻일까? 현재 우리가 마시고 있는 소주는 주정(酒精)에다 물과 감미료를 넣어서 만들

 

기에 희석식 소주란 말이 나온 것이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위해 일단 주정이란 말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알코올 의존증을 표현하였다.

 

주정이란 술의 정수(精髓)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쉽게 말해 순수한 에틸알코올로 보면 된다. 기계 안에서 연속 증류하면

 

순도 95%의 에틸알코올을 만들어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에틸알코올이다. 이 에틸알코올에 물을 넣어 희석시키고 탈취

 

과정과 감미 과정을 거쳐 20%의 알코올이 완성되면 우리가 마시는 소주가 되는 것이다.

 

희석식 소주, 우리 조상들이 마셨던 소주()와는 다르다

 

엄밀히 말하면 이런 희석식 소주는 우리 조상들이 마셨던 소주(燒酒)와는 다른 술이다. 벌써 이름부터가 다르지 않은가?

 

소주의 소(燒) 자를 옥편에서 찾아보면 “사르다, 불태우다”로 나와 있다. 즉, 불을 붙여 증류를 시켜 만든 술이란 뜻이다.

 

이를 좀 더 파고 들어가면 명확해지는데 조상들은 소주를 증류해 이슬처럼 받는 술이라 하여 노주(露酒), 땀처럼 뚝뚝 떨

 

어진다고 한주(汗酒), 불을 대서 만든다 해서 화주(火酒), 색깔이 없다하여 백주(白酒)라고도 불렀다. 이 모두를 종합해 보

 

면 ‘증류’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증류주는 ‘술+불’을 말한다

 

증류의 역사는 기원전 2천 년경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시작되었다(고대 문헌들을 종합해 보면 고대 이집트, 페르시아, 그

 

리스, 중국에 이르기까지 증류 기술이 있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때의 증류 기술은 술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향

 

수나 약재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됐다.

 

 

알렘빅 증류방식

그러던 것이 8~9세기가 되면서 중동 지역에서 알코올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증류 기술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때 나온

 

것이 알렘빅 증류(alembic still) 방식이다. 이 기술이 십자군 원정을 통해 유럽으로 전파되었고 그 결과 나온 것이 브랜디

 

와 위스키이다. 브랜디의 어원이 네덜란드어 브란더베인(brandewijn, 태운 포도주)인 것으로 보면 증류주를 뜻하는 단어

 

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술+불’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아라비아의 아라크와 우리나라의 소주

 

아라비아에서 우리나라의 소주와 같은 술인 아라크

 

소주는 몽골족이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면서 동방 세계로 전파되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소주를 아랄길주(阿剌

 

吉酒)라고 불렀는데(개성 일대에서는 소주를 ‘아락주’라 불렀다) 이 단어의 어원을 더듬어 올라가면 역시 아랍어가 나온

 

다. 아라비아어의 아라크(arak, 증류)란 단어가 바로 그것이다. 아라비아에서는 우리의 소주와 같은 술을 아라크라 부른

 

다.

 

 

몽골군들, 허리에 아락(소주)을 차고 다니다

 

이 소주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시기는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몽골제국 제5대 칸이며 중국 원나라의

 

시조이던 쿠빌라이칸이 다스리던 시대, 그는 바다 건너 일본을 정벌하기로 결심하고 병력을 고려에 보내기 시작했다. 이

 

때 몽골군의 주둔지가 개성, 안동, 제주도 등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우리나라 소주 명산지와 겹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몽골군들은 허리에 가죽 부대를 차고 다녔는데 이 안에는 어김없이 아락(소주)이 들어 있었다.

 

 

아라크(arak)[출처 :  (CC BY-SA)Zyzzzzzy@Wikimedia ]

 

원래 유목민과 증류주는 궁합이 잘 맞았다. 일단 발효주에 비해서 상할 염려가 적었고 가벼웠으며 도수가 높아서 황야의

 

적막한 밤이나 겨울을 날 때 도움이 됐다. 이러다 보니 몽골군들은 누구나 가죽 부대를 차고 다니며 틈틈이 아락을 마셨

 

다.

 

칭기즈칸이 서역 원정 때 아라비아의 아라크를 접하게 됐고 아라크가 몽골에서 아락으로 정착이 되었고, 아락이 일본 원

 

정을 계기로 한민족에게 전파돼 소주가 된 것이다.

 

 

값비싼 소주는 부자들만 즐기던 술이었다

 

몽골제국의 초대 대칸, 칭기즈칸의 모습

 

몽골을 통해 전파된 소주는 몽골군이 물러난 뒤에도 여전히 우리 민족과 함께했다. 아니, 함께한 정도가 아니라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단, 전파의 대상이 한정적이었다. 소주는 곡식을 원료로 해 만들어진 값비싼 술이었기에 일반 서민층은 접근

 

하기가 어려웠다. 지금으로 치자면 고급 양주의 지위였다. 그 때문인지 역사상에 기록된 소주의 이야기는 대부분 부정적

 

인 내용이다. 역사에서 처음으로 소주가 등장한 것은 고려 우왕 원년(1375년)의 일이다.

 

 

단종에게 원로대신들이 소주를 권하다

단종 어진

“사람들이 검소할 줄 모르고 소주나 비단 또는 금이나 옥 그릇에 재산을 탕진하니 앞으로 일절 금한다.”

 

<고려사(高麗史)>에 나오는 내용이다. 보통 왕이 즉위하면 사회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풍속 정화의 영을 내리게 되는데,

 

이때 당당히 그 이름을 올린 것이 소주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소주는 사치품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늘 이렇게 부정적으로

 

만 여겨졌던 것은 아니다.

 

황보인·남지·김종서·정분·이양·허후·강맹경 등이 조계청()에 나와 문안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무릇 사람이 비록 장

 

성한 나이로 있더라도 거상을 하면 반드시 마음이 허하고 기운이 약하게 되는데, 지금 주상께서 나이 어리시고 혈기가

 

정하지 못하시니, 청컨대 타락(우유죽)을 드소서. 또 바야흐로 여름 달이어서 천기가 찌고 무더우니, 또한 청컨대 소주(

 

)를 조금 드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조선왕조실록> 단종 즉위년(1452년) 6월 1일의 기록 중에서

 

 

 

소주가 약으로 쓰이다

 

문종이 죽자 어린 나이로 보위를 이어받은 단종. 그가 임금으로서 한 첫번째 공식 행사가 바로 부왕이던 문종의 거상이

 

었다. 어린 나이로 빡빡한 장례 일정을 따르는 단종을 보면서 원로대신들은 걱정이 됐던 것이다. 이 기록을 보면 소주가

 

약으로 쓰이기도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있던 문화였다. 스코틀랜드의 술 장인들은 증류주를 우식베하

 

(Uisge-beatha, 어스퀴보, 위스퀴보를 거쳐 위스키로 정착이 됐다)로 불렀는데 이는 켈트어로 ‘생명의 물’이란 뜻이다. 브

 

랜디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브랜디의 일종인 ‘오드비(eau de vie)’라는 술 역시 생명의 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본래의 목적인 음주를 위해 마시다

 

그러나 증류주는 약보다는 본래의 목적인 음주를 위해 쓰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기록보다 좋

 

지 않은 기록이 훨씬 더 많을 수밖에 없었다.

성종대왕 태실비

경연()에 나아갔다. 강()하기를 마치자, 사간() 조효동()이 아뢰기를, “세종조()에는 사대부()

 

집에서 소주()를 드물게 썼는데 지금은 보통 연회()에서도 모두 쓰므로 낭비가 막심하니, 청컨대 모두 금지하도

 

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와 같은 일은 사헌부()에서 마땅히 금지할 것이다.” 하였다. 이어 좌우에게

 

묻기를, “어떻겠는가?” 하니, 특진관() 손순효()가 대답하기를, “일일이 금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고, 지사

 

() 어세겸()이 말하기를, “소주()는 비록 낭비한다고 하나 가난한 자는 스스로 할 수 없고, 또 국가에서 어

 

찌 사삿집의 비축을 억눌러서 절제시킬 수 있겠습니까?”―<조선왕조실록> 성종 21년(1490년) 4월 10일의 기록 중에서

 

 

소주는 비싼 술이자 사치품

 

조선시대 문인이던 조효동이 고급술인 소주가 일반 사대부 집에서도 아무 규제 없이 막 쓰이고 있는 것을 비판하면서 이

 

런 폐단을 막기 위해서는 규제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성종에게 고하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성종은 규제를 하는 쪽으로 마음을 먹었으나 신하들이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이 지사

 

(知事) 어세겸의 발언이다. “비록 낭비한다고 하나 가난한 자는 스스로 할 수 없고”라는 부분이다. 이때까지도 소주는 비

 

싼 술이었고 사치품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집에서는 고급술인 소주가 막 쓰이고 있다.

 

1965년 양곡관리법으로 소주 제조에 일대 변혁이 시작되다

 

고려 말에 전래된 소주는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강점기 초반기까지 제조법에 큰 변화 없이 전통소주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던 것이 1919년, 평양에 알코올식 기계 소주공장이 세워지고 이어 인천 · 부산에도 건설되어 재래식 누룩을 이용한

 

소주는 흑국소주로 바뀌고 1952년부터 값싼 당밀을 수입해 만들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1965년 정부의 식량 정책 중 하나로 나온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면서 소주 제조에 일대 변혁이 시작된다. 우

 

리 고유의 맛과 향기를 즐길 수 있었던 증류식 순곡주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고구마, 당밀, 타피오카

 

등을 원료로 해 만든 주정을 희석한 희석식 소주가 차지하게 된 것이다.

 

고구마

 

소주는 서민의 대표 주류

 

1970년이 되자 소주는 또 한 번의 대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 전국에 퍼져 있던 254개 소주 업체를 싹 정리해 주류회

 

사 통폐합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당시 통폐합의 명분은 저질 주류 생산 방지와 유통 질서 회복이었다). 이런 주류 회사의

 

통폐합으로 1977년, 각 지방별 제조장 기준으로 각도에 한 개씩 총 열 개의 희석식 소주업체가 유지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전에도 소주는 서민의 대표 주류이자 고단한 삶을 달래주는 친구였다. 요즘은 다양한 오락과 유흥이

 

있기에 그 영향력이 많이 줄어들었지만(사실 그렇지도 않은것이 오락과 유흥하면 소주와 술을 빼놓을 수 없다.) 소주가

 

대한민국 대표 주류라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설문 조사를 보더라도 술 하면 떠오르는 것이 소주라

 

말한 이가 과반수 이상인 것을 보면 이미 소주는 술 그 이상의 의미로 사람들의 일상에 존재하는 것 같다. 물론 그 사이

 

수차례의 부침이 있었지만 소주는 꿋꿋이 우리 곁을 지켰다.

 

많은 술이 진열되어 있다.

 

소주, 칵테일 소주로 진화하고 젊은 여성층을 끌어들이다

 

젊은세대가 소주 대신 맥주를 찾으면서 소주의 위기가 찾아왔지만 소주는 레몬소주와 같은 칵테일 소주로 한 차례 진화

 

를 시도하더니, 젊은 여성층을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도수를 낮추기 시작했다. 그 결과 소주는 여전히 대한민국 대

 

표 주류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분간 그 타이틀을 다른 술에게 넘겨줄 것 같지 않다.

 

거의 800여 년 간 이 땅을 호령했던 소주. 아마 1천 년을 채울 것 같다. 아니, 더 오래갈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에서 술 하면 역시 소주인 것이다.

 

 

 

 

 

 

자료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소주 - 칭기즈칸이 마시던 아라크 (사물의 민낯, 2012. 4. 16., 김지룡, 갈릴레오 SNC)

728x90
반응형
LIST

댓글